하얀 모란꽃 한 송이가 새벽을 연다. 이년 전 이른 봄에 한 뿌리를 구해 심었다. 때 이른 봄 날씨에 적응을 하지 못했는지 그해와 작년까지는 겨우 한 가지만 살아 남았다. 그 가지가 올 해는 일찍부터 키 자랑을 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오늘 하얀 꽃을 피웠다. 반드시 꽃을 피우고 말겠다는 모란의 열망에 고개가 숙여진다.
매년 봄이 되면 떠 오르는 의문이 있다. 꽃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또 지는 꽃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어느 순간 꽃이 피었고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갑자기 아름다운 꽃이 나타나니 얼마나 신비하고 좋았는지, 그러다가 그 아름다운 꽃이 사라지니 또 얼마나 아쉽고 슬펐는지 모른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 공(空)에서 왔다가 무(無), 공(空)으로 간다.' 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신비하게 왔다가 신비하게 사라진다. 이 세상 모든 것 중 어느 하나라도 왔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의 몸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새들도 그렇다. 모두 다 신비스럽게 왔다가 신비스럽게 사라진다. 그 신비는 도저히 풀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무(無) 또는 공(空)이라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신비스러움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어떤 능력으로도 풀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그 느낌을 느끼는 자가 있음이 분명하다. 붓다는 그 느끼는 자를 의식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이 의식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몸과 마음은 죽어도 의식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의식은 구름 한점 없는 하늘, 먼지 하나 없는 거울과 같다. 하늘과 거울 처럼 주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본연의 그 맑고 푸르고 깨끗함은 더럽혀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동요되지 않고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마음이라는 구름에 가려 본래 의식을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에 놓여있다. 마음이라는 구름을 걷어 내고 영원히 맑고 푸르름을 잃지 않는 하늘, 즉 본래 의식을 찾아야 한다. 이 본래 의식을 찾지 못하는 한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가 살아온 모든 역사를 통해 모든 인간이 쌓아올린 욕망의 덩어리다. 본래 의식을 완전히 뒤덮은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부모, 사회, 종교, 교육의 집합체이다. 부모와 사회, 종교, 교육은 본래 의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본래 의식을 되찾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
부모와 사회와 종교와 교육이 아니었다면 살고 있을 내 삶을 찾아야 한다. 전통과 관습 때문에, 사회의 법과 제도 때문에, 종교의 계율 때문에, 지식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교육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한 삶을 찾아와야 한다.
거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야 한다. 모든 욕망의 덩어리인 마음을 덜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본래 의식을 되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살아온 것은 이 욕망의 덩어리인 마음 때문이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반드시 변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변하지 않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 때문에 고통이 오고 불행이 뒤 따르는 것이다. 영원한 부자도, 영원한 권력도, 영원한 젊음도, 영원한 건강도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변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 때문에 수많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해도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본래 의식이다. 이 세상 모든 변화를 그저 지켜볼 뿐 조금의 흔들림도 없기 때문이다. 이 본래 의식은 죽음까지 지켜본다. 본래 의식은 육신(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죽어갈 때 그 광경까지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붓다는 이를 두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는 표현을 썼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면 편하다. 그런데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순간 편하지 못하다. 꽃이 피면 반드시 진다는 것을 알면 집착할 필요가 없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삶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태어나고, 젊은이가 되고, 사랑을 하고,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힘이 빠지고, 병이 들고 죽는다는 것을 알면 그 과정을 편하게 받아 들일 수 있다. 다만 그 때 그 때의 삶에 온 집중을 다하는 것 뿐이다. 후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는 순간 순간을 사는 것이다.
순간 순간을 후회없이 미련없이 사는 삶, 매 순간을 놓치지 않는 삶, 과거나 미래에 끌려다니지 않는 삶, 한 순간만이라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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